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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TI

[삼국지 인물] 관우(ISFJ)

by 후치 네드발 2021. 2.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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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창기 행적이 부실한 것은 그와 관련된 군사적인 기록도 마찬가지이다. 조조가 그를 얻기 위해 그토록 공을 들였고, 유비가 기반없이 방랑하던 시절부터 만인지적 소리를 공공연히 들었던 점으로 미루어 무척이나 화려한 전적이 있었던 것으로 짐작되지만, 촉한의 창업공신들 대부분이 그러하듯 초창기 기록이 없어서 확인이 불가하다.

선주전에 의하면, 유비는 황건적 토벌과 공손찬 휘하에서 원소와 싸워 많은 공을 세웠는데, 그 공으로 벼슬을 받은 것이었다면 유비의 휘하에 있던 관우도 전장에서 활약했을 가능성이 높다. 특히 계한보신찬의 "藩屏左右,翻飛電發,濟於艱難,贊主洪業"(울타리처럼 좌우를 지키고, 벼락처럼 날아가, 어려움과 곤경에서 구해내어, 주인의 큰 일을 도왔다)를 생각하면 관우는 유비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관우의 오만함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가 마초가 촉에 귀순했을 당시 제갈량 에피소드이다.

마초가 촉에 새로 들어왔을 때 형주에 있던 관우가 그가 어떤 인물인지 궁금해 제갈량에게 편지를 보내 이를 물어봤는데, 제갈량은 관우가 이런 문제에 민감하다는 걸 알고 답장을 이렇게 썼다.

"맹기는 문무를 겸비했으며 용맹함은 일반인을 뛰어넘는 이 시대의 걸출한 인물로 한나라 때 경포나 팽월 같은 수준이라서 익덕과 나란히 선두를 다툴 수는 있겠지만, 염(髥, 관우의 칭호였던 미염공을 뜻함) 그대의 절륜한 출중함에는 미치지 못합니다."

관우는 이 답장을 받고 아주 기뻐해 빈객들에게 보여주기까지 했다 한다.

 

나관중본 삼국지연의에서는 관우의 죽음 뒤에 관우와 장비의 성격을 평한다. 이에 따르면 관우는 강한 사람을 억누르고 약한 자를 동정하기에 병졸들이 다투어 그 앞에 와서 하소연하면 항상 화해시켰다. 하여 그의 병졸들은 관나리께 미안하다고 차마 그에게 오지 못했다. 이는 곧 성격이 원만한 상사로 여겨진 것이다.

하지만 정사 기록에서는 사대부를 업신여겼다고 한다. 아마도 관우는 당시 하층민을 대변하는 입장에 있었던 것이 아닐까 싶다. 이와 반대로 장비는 군자는 우러러봤지만 병졸들에게는 가혹한 편이었다. 정반대의 성격인 두 사람이지만, 모두 각각의 이러한 결점 때문에 최후를 맞는 것이 아이러니하다.

나관중의 삼국지연의에 의하면, 그가 지닌 무공이나 지략은 유비를 충분히 압도했으나, 도원결의 당시에 유비가 한황실의 후손임을 알게된 관우는 스스로 아우가 되기를 청했던 점으로 보아 그는 태평성대였던 후한을 부흥시킬 뜻을 가지고 있었고, 몰락한 후한의 후예였던 유비는 관우에게 있어서 자신의 뜻을 펼칠 인물이였던 것이다.

 

그의 무공에 관하여 정사의 기록은, 관우가 적진 한가운데 있는 상장을 참하거나 이마에 화살을 맞고도 군을 지휘하였다는 내용 등과 같이 보통사람이라고 믿기 힘들 정도의 관우의 용맹스러움을 증명한다.

또한 정욱전을 시작으로 나오는 만인지적(萬人之敵)이라는 표현은 정사, 연의를 통틀어 오직 관우와 장비에게만 부여된 칭호이다. 유엽전에서는 '삼군을 뒤덮을 용맹', 여몽전에는 '곰과 호랑이같은 장수' 등등 용맹함을 강조하고 있다. 덧붙여, 주유의 천하이분지계에서도 관우가 언급되는데, 정사 주유전에서 손권에게 진언하기를, '주공이 잘 좀 해서 유비를 붙잡아 두시고 내가 관우, 장비를 부려 정복사업을 도모하면, 서촉은 밥이고, 조조도 말아먹을 수 있다' 정도의 이야기를 한 것이 나온다. 이렇듯 관우의 용맹에 대한 찬사가 줄을 잇는다.

심지어 정사를 쓴 진수도 관장마황조전의 평에서 관우와 장비를 '만인을 상대할 만한 장수'라고 평했는데 이는 진수로서는 이례적인 평가이다. 인물평에서는 주로 인품이나 업적 등을 말하기 마련이다. 무장의 경우도 대부분 사람 됨됨이나 군사적인 업적에 대해 말하지 무예나 용맹에 대해 서술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이렇듯 관우의 용맹은 가공할 것이었고, 당대의 장수와 재사들은 모두 이를 두려워했다. 동시대인들이 그에 대해 남긴 평가를 살펴보면 하나같이 용맹스럽고 무서운 장수라는 이야기들 뿐이다. 농담이 아니라 정말로 한마 유지로급의 결전병기 취급을 받았다고 할 수 있겠다. 하긴 백마에서의 포스를 생각하면 이런 취급을 받는 것이 당연할 지도. 특히 백마에서의 신기(神技)를 보이기 이전 시점에 이미 조조군 참모진들에게 만인지적으로 평가받고 있었다는 점 또한 주목할 부분.

한가지 주목할 점은 관우가 적대하거나 업신여긴 인사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전부 호족, 사대부같은 당대 기득권층에 속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를 형처럼 따랐던 장비와 가장 대비되는 점인데 장비가 사람을 군자와 소인으로 나누어 군자는 지위와 경력을 막론하고 예우하고 소인에겐 가혹했다면 관우는 아랫사람들에겐 적장 여몽조차 인정할 정도로 관용을 베풀었지만 기득권층에 속하는 사람들과는 지역, 경력, 능력 막론하고 트러블을 일으켰다. 이런 차이때문에 관우와 장비의 출신은 정반대일 것이라는 추론도 있다.

강자(사대부)에게는 오만한 반면, 약자에게는 온화했던 관우의 성격은 그가 패망했던 번성 공방전에서 잘 드러난다. 조조가 8만 원소군을 생매장한데 비하여 관우는 우금과 3만의 포로들을 살려두었고 이들도 먹여살리기 위해 동맹국이었던 오나라의 군량을 탈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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