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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인물] 조조(ENTJ)

by 후치 네드발 2021. 2.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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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조의 군사 전략에서 문제점은 두가지를 들어 볼 수 있는데, 하나는 개인 친정 중시이며 다른 하나는 친족 중시이다. 다만 이는 순수하게 군사적인 결점이라기보다는, 조조 세력이 가진 정치적 문제로 인한 한계가 군사적 측면에서도 드러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조조는 다른 지역을 침공할 때 자신이 직접 진두지휘(陣頭指揮)를 하는 모습이 많이 보였다. 하북 정벌, 오환 정벌, 형주 정벌, 강동 정벌, 한중 정벌이 모두 조조의 친정 아래에서 이루어졌는데, 이는 유비가 관우나 장비 등의 자신의 부하로 하여금 다른 지역을 점령하게 하고 관우가 독자적으로 형주 북쪽 지역을 침공한 것과 비교된다. 하지만 조조 자신이 노년에 접어들면서 신체 정신적 역량이 떨어지게 되었는지 친정의 결과도 악화되는데, 형주 정벌을 마지막으로 적벽대전과 한중 공방전이라는 두 결점을 남기면서 영토 확장이 좌절되게 된다.

이는 조조가 스스로 한 왕조의 군주로서 과업을 수행한 다른 통일 군주들과는 달리 한 황실을 등에 업는 '협천자'라는 정치적 입장을 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른 통일 군주들은 그 자신이 '천자'이기 때문에 유능한 군사 인재들을 마음껏 기용할 수 있었으나, 조조는 자신의 휘하에 포용할 수 있는 인재에 한계가 있었으며 재능은 둘째쳐도 '군공'을 나눠주는 것이 정치적으로 곤란했다. 만일 한 지역을 정복하는 거대한 정벌 계획을 조조 이외의 인물이 나서서 수행하고, 그 인물이 성공을 이룩하게 된다면 조조의 정치적 입지는 크게 약화된다.

조조는 권력을 유지하기 위하여 군권을 손에 놓을 수 없었으며, 언제나 전쟁에 나서야 하고, 이기지 못하면 정치적 입지가 손상되었다. 후한과 공존하는 막부의 우두머리라는 입장상, '조조의 대안'이 될 만한 장수가 나타나면 그는 후한 조정을 등에 업고 또 다른 '협천자'를 수행할 수 있었으므로 이러한 상황이 되는 것을 철저하게 막아야 했다. 따라서 노년의 나이에도 친정을 하고, 항상 자신이 주도권을 가지고 있고자 하였다.

 

조조는 군사 분야에서는 조씨, 하후씨 친족을 매우 중시했다. 항장이나 이성의 숙장들을 대우하기는 했지만, 기본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친족 장수들을 우위에 놓고 그들로 하여금 항장들을 감독하도록 하는 조치를 취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 역시 다소 불안정한 정치적 입지에서 만에 하나 반란을 일으킬 수 있는 군을 장악하려는 의도였을 가능성이 높다.

문제는 조씨, 하후씨 일족에는 그 지위에 걸맞는 군사적 능력을 가진 인물들도 많았지만, 상당히 역량이 부족한 인물도 있었다는 점이다. 아무리 봐도 정사에서 그 지위에 걸맞는 수준의 '군공'은 찾기 어려운 조홍과 하후돈이 대표적인 사례이며, 비교적 명장으로 꼽히는 하후연 역시 한중 공방전에서 패배하여 사망한 직후 조조 자신이 하후연의 사령관으로서의 역량 부족을 한탄한 기록이 남아 있다. 하후연은 야전사령관으로서는 훌륭했지만 전선사령관으로서는 한계를 드러냈다.

이런 문제점이 조조의 군사 행동에서 문제를 일으키기는 했지만, 이 역시 어쩔 수 없는 선택에 가깝기는 하다. 조조는 상당히 자주 내부 반란에 시달렸는데 서주 공방전 와중에는 여포를 앞세운 진궁, 장막이 일으킨 본거지 연주에서의 반란으로 거의 죽을 뻔 했고, 협천자 이후에는 후한 황제와의 마찰로 인해 여러 차례의 반란에 지속적으로 시달렸다. 동승 등이 대표적인 사례이며 후한 내에서의 반 조조 반란은 조조가 죽을 때까지 완전히 없어지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조조가 정권을 유지하려면, 군권을 꽉 집기 위하여 친족을 중용하는 정실 인사를 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장단점이 있는 것은 과감성이다. 조조는 일견 무리하게 보일 정도로 과감한 공격을 펼치는 경우가 많았으며, 관도대전, 오환정벌 등에서는 이러한 과감한 공격이 성공을 거두었다. 하지만 이 때문에 위기를 자주 겪기도 했는데 동탁을 추적하다가 서영에게 대패를 당해서 겨우 목숨을 건진 것이 그 사례이다. 역시 과감하게 나섰던 적벽대전에서는 보급 문제, 질병 문제가 겹치면서 무너지게 된다.

원소를 쓰러뜨린 이후에는 그전의 조심성은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오만해져서 문제를 만드는 경우도 많았다. 원가의 잔당을 토벌할 때는 필사적으로 원담과 원상의 사이를 가르는 이간계를 쓰고 조심하면서 과감하게 싸웠던 조조가 손유동맹과 싸울때는 괜시리 손권에게 허세를 떨지 않나, 패배 이후 형주를 떠날때 병사를 충분히 남겨놓지 않고 떠나자 유비가 오면 어쩌냐는 유파의 말에 그럼 내가 친히 육군을 몰고 와서 막겠다는 말을 해서 유파를 벙찌게 했다. 이에 대해서는 조조에게 가장 강력하고 위협적이었던 원가의 세력을 완전히 말살하고, 상당히 강력했던 유표의 잔당마저 흡수한 뒤라서, 남아있는 손권과 유비의 세력이 약했기 때문에 정신적으로 해이해졌다는 분석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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