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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이 민주화 되는 과정

by 정보 채널 2022. 1.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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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youtube.com/watch?v=ccGE6DoVXFY

 

잠빈 바트뭉흐(당시 몽골 인민혁명당 서기장): 근데, 과연 우리 몽골에서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할 수 있을지, 혼란이 없을지 저는 그게 걱정됩니다.

산자수레깅 조릭(몽골민주동맹 위원장): 저는, 몽골인들의 본성과 상식을 믿습니다.

잠빈 바트뭉흐: 저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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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은 1984년, 소련에서는 고르바초프가 집권했고, 몽골에서는 노쇠한 욤자깅 체뎅발이 사임하고 소련으로 이주했다. 표면적으로는 이주였지만 사실상 축출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후임으로는 잠빈 바트뭉흐가 선출되었다. 바트뭉흐는 어디까지나 일개 소련 위성국의 바지사장에 불과했다. 바트뭉흐는 보수적이었지만, 그는 고르바초프가 하는 것을 그대로 따라하는 꼭두각시에 불과했다. 곧 소련에서 글라스노스트와 페레스트로이카 정책을 펼치자, 몽골에서도 개혁개방 정책인 신칠렐을 입안했다. 곧 외국 자본들은 몽골 기업들과 합작 형태로 몽골의 자원에 손대기 시작했고, 인프라는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바트뭉흐는 경직된 정치체제까지 아직 바꿀 생각은 없었고, 이에 몽골의 온도계는 99도에 이르렀다.

 

 

(몽골 민주화 시위에서 발언하는 차히아긴 엘벡도르지)

 

차히아긴 엘벡도르지는 모스크바 국립대학교에서 공부하고 있는 몽골 출신 유학생이었다. 엘벡도르지는 대학에 다니는 동안 글라스노스트에 대해 배우면서 민주주의의 중요성을 깨닫게 되었고, 더 나아가 자신의 조국인 몽골이, 최소한 소련과 같은 사회주의 하 민주주의와 자유를 누릴 수 있으면 좋겠다는 이상을 가졌고, 민주주의를 위한 변화를 만들어야겠다는 마음을 굳히게 되었다.

 

1989년 엘벡도르지는 귀국한 뒤, 당해 11월 28일 울란바토르의 몽골인민공화국청년예술가제2차대회에서 "우리는 페레스트로이카가 시기적절하고 용감한 조치라고 생각합니다. 이 혁명적인 과업에 대한 청년들의 기여는 발언만이 아닌 행동으로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청년들이 이룩해야 할 목표는 민주주의와 투명성을 기반으로, 글라스노스트에 기여하며 공정하고 진보적인 정1권을 창출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민주주의를 위한 청년조직을 만들어, 자발적이고 민주적인 원칙에 근거하여 미래로 나아갑시다."라고 발언하며 몽골의 민주화를 호소했다. 의장은 다음부터는 그런 발언을 하지 마라고 제지했으나, 발언을 딱히 막지는 않았다.

 

회의 쉬는 시간에, 다리 수흐바타르와 치메딘 엥흐가 엘벡도르지를 찾아왔고, 이 셋은 몽골민주동맹을 조직하였다. 이후 몽골국립대학교의 교수이던 산자수레깅 조릭이 동참하였고, 몽골국립대학교의 지하 강당에서 몽골의 민주화에 찬성하는 학생들이 비밀리에 모여 민주주의, 자유시장경제, 사회민주주의 등에 대해 논의하며 민주화운동 조직 계획 초안을 작성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비밀리에 소문을 내어 첫 시위를 조직했다.

 

1989년 12월 10일, 울란바토르에 있는 청년문화센터 앞에서 첫번째 공개시위가 일어났다. 이곳에서 엘벡도르지는 몽골민주동맹의 창설을 발표했고, 이것이 몽골 공산정부 68년 역사상 첫 시위였다.

 

시위대는 자유선거와 경제개혁을 요구했다. 그들은 소련의 식민화를 반대하는 입장에서 키릴 문자를 배제하고 라틴 문자와 전통 몽골 문자로 전단지와 구호를 적었다. 소련이 몽골을 중국에 팔 수도 있다는 소문이 들려오자 시위대는 한층 더 나아가 민주혁명을 요구했고, 시위대의 숫자는 더 불어났다.

 

1990년 1월 14일, 수천명의 시위대가 광장에 모였다. 영하 30도의 눈보라가 침에도 불구하고. 칭기스칸의 초상화가 나왔고, 1962년 칭기스칸을 재조명하려다 소련으로 압송되어 숙청당한 터머르오치르 전 교육장관을 추모했다.

 

몽골의 혹한에도 시위는 몇달이나 지속되고 있었다.

 

(잠빈 바트뭉흐 인민혁명당 서기장)

 

바트뭉흐는 고심에 빠져있었다. 정치국 위원들과 군부는 이미 시위대를 무력으로 진압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고, 서기장의 서명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당원들 역시 반동분자들을 천안문처럼 밀어버리라고 강력하게 요구했다. 그러나 시위가 시작한지 세달이 넘도록 군경은 시위를 그저 지켜만 보고 있었다.

 

 

바트뭉흐는 매우 인자하고 침착한 사람이었다. 1990년 3월 9일은 인민혁명당 중앙위원회 제8차 대회가 있는 날이었고, 모두는 바트뭉흐가 대회에서 강경진압 방침을 이제서야 내세울 것이라고 생각했다.

 

대회 전날, 바트뭉흐에게 정치국 위원들이 찾아왔다. 그들은 실탄 사격을 서기장에게 정중히 요청했고, 베이징처럼 우리가 한번만 고생하면 사회주의 체제가 굳건하리라고 그를 설득했다. 그 얘기를 듣자마자 바트뭉흐는 평소 그와 성격과는 다른 행동을 보였다.

 

"동지, 아니 당신네들 미쳤소? 지금 나보고 살인자가 되라고 하는 것이오? 우리 몽골인들은 절대 서로 피를 흘리면 안된다고 내가 말하지 않았소!"

 

격분한 그는 책상 위에 있던 물건들을 내던졌다.

 

"내가 사회주의 체제의 반역자가 되는 한이 있더라도 절대 무력을 사용하지 마시오!"

 

 

바트뭉흐는 이 상황을 평화롭게 끝낼 유일한 방법은 무력진압이 아닌 본인의 사임과 자유선거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날 오후, 바트뭉흐는 조릭과 만났고, 이런 대화가 오갔다.

 

"내일 대회에서, 저를 비롯한 정치국원 전원이 사임할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잘하신 결정입니다."

"근데, 과연 우리 몽골에서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할 수 있을지, 혼란이 없을지 저는 그게 걱정됩니다.

"저는, 몽골인들의 본성과 상식을 믿습니다."

"저도요."

 

그렇게 1990년 3월 9일, 당 중앙위원회 제8차 대회 이후 정치국원 전원은 사임했으며, 인민혁명당은 1990년 6월 자유선거를 약속한 채로 일당독재를 내려놓았다.

 

 

네달동안 이뤄진 시위에서 단 한 명의 사람도 죽지 않았고, 자유민주주의가 몽골에 찾아왔고, 모두가 승리자가 되었다. 바트뭉흐는 시골에서 소박하게 농사를 지으며 여생을 보냈고, 엘벡도르지는 몽골의 대통령이 되었다. 다만, 산자수레깅 조릭은 안타깝게도 의문의 총격으로 살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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