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수능 영어문제는 어렵다.
나는 2013년에 수능을 치면서 영어에서 이 문제 하나를 틀린 기억이 아직도 난다.
다행히 그 해 영어가 불지옥이어서 1등급은 지켰다.
그때 지문이 너무 아까워서 지금도 문항 번호가 기억이 날 정도다.
그리고 이런 어려운 영어 지문들은 대개, 문단에서 문장 하나를 빼서 구글에 검색하면 원전이 나온다.
아무리 날고 기는 영어 교사들을 한 방에 몰아넣고 한달을 준다 해도 이런 어려운 글을 직접 쓸 리는 없지 않은가.
저 글을 처음으로 찾았을 때 인문교양 과목에서 저 글과 비슷한 주제의 글들을 읽고 있어서 괜한 흥미로 처음부터 읽어보려다가 포기했었다.
당시 수강하던 수업에서 주던 과제처럼 한주동안 끝까지 읽고 감상문을 써야 하는 처지였다면 모를까, 이건 너무 길었다.
글에서 문제에 해당하는 부분으로 ctrl+F로 검색하면 답은 5번이다. 지문은 과학자가 과학자들끼리 과학을 할 때의 수학적인 엄밀함을 어기고 보통 사람들에게 두루뭉술해질 수 있는 비유나 수사로 개념을 설명해야 하는 상황을 논한다.
내가 기억하고 있는 이 글은 비교적 오픈된 경로에서 볼 수 있고, 무려 2013년 여름에 저널에 기고된 글이어서 검색이 쉬운 편이다.
(그러니까 이 문제를 출제한 선생님들은 그 해 나온 따끈따끈한 햇저널을 수능 문제로 꽂아버린 거다.)
물론, 작년 수능에 나온 heritage에 대한 글도 원전이 있다.
단 직접 찾는데는 조금 손이 더 갔다.
우선 우리나라 문제풀이 블로그들과 그 문제를 외국 족보사이트 체그(!)에 올린 링크 밑에 해당 본문을 인용한 다른 책이 나오고,
그 책에는 해당 글이 어디에서 나왔는지 표시해주는 인용구가 있다.
저자와 년도, 키워드가 있으니, 구글 학술검색으로 원전을 찾을 수 있다.
이 단계에서는 학교 내부망의 저널 열람권이 도움이 되었다.
그리고 이렇게 본문을 찾다보면 출제자들의 일말의 양심을 발견하기도 한다.
아무리 다른 사람이 쓴 논문을 인용해와서 본문을 만들더라도,
단락이 너무 길거나 말이 난해하면 조금씩 글을 고쳐서 문제로 쓰는 걸 확인할 수 있다.
왼쪽 단 바닥에 있는 문단의 앞쪽 절반을 정답 문장이 있는 문단 부분 옆에 대충 붙여봤다.
수능 질문에 나온 본문과 비교하면 이쪽이 더 길다.
영어를 모국어로 쓰는 사람도, 영어랑 한국어 외 여러 언어를 유창하게 쓰는 타일러좌도 보고 어려워하는 게 우리나라 수능 영어문제를 보는 외국인들의 클리셰인 만큼,
우리나라 수능 영어 3점문제는 확실히 어렵다.
어려운 게 당연하다. EBS 반영 범위 바깥에서 나오는 3점짜리 불지옥 문제들은, 대학생도 흔하게 접하지 않고 대학원생들이나 하루종일 읽고 있을 각 분야의 전문서적의 글과 저널의 논문들을 수능 수준에 맞지 않는 단어들만 쳐내어 낸 결과물들일 테니까.
대학 졸업 조건으로 필요해서 친 적이 있는 토익 시험도, 문제가 많아서 시간은 촉박했지만,
문제 하나하나의 체감 난이도는 수능 영어만큼 힘들지 않았던 것 같다.
나는 고3때 수능 영어 준비를 할 때를 살면서 어려운 영어 글을 제일 많이 읽어본 시기로 손꼽는다.
그렇다면 우리나라 수능은 왜 고3에게 논문을 발췌한 글을 읽게 시킬까?
평가원은 대수능의 성격과 목적의 첫번째로,
대학 교육에 필요한 수학 능력 측정으로 선발의 공정성과 객관성 확보를 적어뒀다.
올해 학부를 졸업하고 그동한 한 공부를 떠올렸을 때, 아주 순진하고 원론적인 얘기를 하자면
수능은 당장 수학을 얼마나 잘하는지, 영어 단어를 얼마나 외웠는지가 아니라
난해하고 처음 보는 개념들을 마주쳤을 때 짧은 시간 안에 이를 얼마나 잘 이해할 수 있는지,
즉 얼마나 벼락치기를 잘 할 수 있는지를 보는 시험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 능력이 숫자로 나타나고, 그 숫자를 사교육으로 뻥튀기하면 좋은 대학에 들어갈 수 있다는 문제는 일단 논외로 하자.)
그래서 내가 생각하는, 고3 수능 문제에 학부를 웃도는 수준의 정답률 30~40프로짜리 3점 지문이 존재하는 이유는,
(대충 인공지능 스고이할 거리는 글)
그 문제들이 그 지문의 글들만큼 읽기 더러운 글을 읽어야 하는 곳으로 잡혀갈 사람들을 뽑기 위해 필요해서라고 생각한다.
지금 와서 다른 사람들의 글을 읽고 공부를 하고 있으니, 한 분야에 진학해서 취직 대신 공부를 자기 업으로 삼고자 한다면, 그 후로 그 분야의 전공자가 읽어야 할 글은 어느 언어로 봐도 난해할 거란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러니 국어는 블록체인이나 허프만 코드로 비문학 문제를 내고, 영어는 사회과학 논문을 발췌하는 것일 거다.
그리고 대학들은 그런 난해한 글을 빠르게 읽고 이해해서 벼락치기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이 높은 순서대로 학생들을 뽑아가고 싶을 것이라 생각한다.
고등학교 때 1.0x등급을 맞는 초인적인 학생들이 서울대 의대에 가서 초인적인 분량을 암기하는 것처럼.
그러니까, 어려운 지문이 인생에 무슨 도움이 되나 현자타임이 오면,
어떤 사람들은 학과 진로에 따라 하루종일 그런 글만 읽고 살아야 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 위안이 될 거다.
영어 만점, 1등급, 2등급을 가르는 3점 지옥문제들은 나중에 그런 글을 하루종일 읽는 고통을 겪을지 모르는 학생들이 풀라고 내놓은 문제들이다.
대신, 문단 중심생각을 찾는 공식으로 머리를 굴리다 의욕이 떨어지면 1분 30초 안에 풀어야 하는 문제 하나의 지문을 한참동안 한문장씩 곱씹으면서 읽어보는 걸 추천해본다.
그렇게 편법 안쓰고 한문장 한문장 천천히 읽다 보면 아주 느리지만 정직하게 느는 게 또 독해력이기도 하다.
물론 수능이 코앞인 분들은 지금 그러기는 힘들겠지만....
나는 그렇게 읽은 글들 중에서 남미에서 폴리네시아까지 뗏목 타고 이주하는 게 이론상 가능하다는 걸 증명한(나중에 밝혀진 바로는 틀린 가설이었지만) 콘 티키 썰이 제일 재밌었다. 어케건넜누 시발련ㄴ아.
세줄요약:
1. 수능 영어 지옥문제는 논문급 문헌에서 발췌하므로 어려운 게 당연하다.
2. 놀랍게도 그런 더러운 글들을 맨날 읽어야 하는 진로가 우리나라에 존재한다.
3. (예비)수험생은 공부하다 그런 지문 이해 안된다고 부담가지지 말고 차근차근 읽으며 마음을 다스려보자.
여담: 난 고3 한 해동안 수능 영어 읽기 문제를 대충 500개 정도 풀고 그걸로 통계 계산을 해서 내가 영어 만점을 맞을 확률을 계산해본 적이 있다.(이과 이다)
96점을 중심으로 표준편차가 4에서 5점 정도 되었고 만점 확률이 6분의 1 정도였으니, 내 실제 점수 97점은 꽤 예상에 근접한 셈이다. 그때 문제풀이 훈련의 한계를 조금 느꼈었다.
여담2: 그리고 내가 그 "하루종일 그런 글만 읽고 사는" 대학원생이 될 예정이다. 바트한테 짤릴까봐 꽁지머리는 안길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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