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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TI

INTP와 타유형의 개인적 일화 (1)

by 정보교류 2021. 2.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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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NFP

ENFP와 처음으로 단둘이 맥주를 마시게 된 날, ENFP는 ‘물을 차갑게 마시고 싶으면 냉장고에 넣어뒀다 마시면 된다’, ‘최승자의 성은 최이다’, ‘배가 고프면 무언가를 먹으면 된다’ 와 같은 당연한 얘기를 마치 책 1억 권을 읽고, 인생의 쓴 맛과 단 맛을 다 맛 본, 열반에 든 성인이 얻은 깨달음이라는 듯이 내게 말했다. 말하는 ENFP의 태도가 너무 진지해서 나는 그만 현기증이 났다. 페이크 다큐를 찍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음악의 신 같은 걸 내가 찍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새로운 인간 군상에 대한 호기심 때문에 묵묵히 ENFP가 하는 말을 들었다. 다양한 케이스를 모으는 정신분석가처럼 나는 ENFP를 관찰했다. 나로서는 처음 보는 타입의 인간이었기 때문에 신기했다. ENFP와의 관계가 진척된 후 물론 ENFP가 ‘너 같은 사람 처음 본다’는 말을 내게 종종 했긴 했지만 말이다.

감독자(INTP)와 감독 대상자(ENFP) 관계 답게, ENFP는 은근히 내 말을 잘 들었고, 그게 나를 내심 뿌듯하게 만들기도 했다. ENFP는 내가 추천한 영화를 보고 책을 읽었다. 언젠가 내가 폴 토마스 앤더슨의 마스터를 추천했을 때 ENFP는 자신의 자취방에서 줄담배를 피우며 감탄하며 영화를 봤다고 했다. 연기를 배우는 걸 그만두긴 했으나 아직 미련이 남아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아무튼 ENFP는 내게 자신의 감상평을 들려주었다. ENFP는 호아킨 피닉스의 역할에 감정 이입을 했고, 나는 물론 필립 세이모어 호프만의 역할에 감정 이입했다. 감독자와 감독 대상자 관계가 이 대목에서 여실히 드러났었구나 싶다. 아무튼 나는 ENFP를 떠올리면, 영화 ‘쓰리 빌보드’에 나오는 샘 록웰이 생각난다. 구제불능으로 보이지만, 참을성 있고 마음이 따뜻한 조력자의 애정과 믿음이 있다면, ENFP도 본인이 그토록 집착하는 ‘좋은 사람’이 될 수도 있겠다 싶다. ENFP에게 필요한 건, 팩트가 아니라 따뜻한 격려와 응원이라는 걸 아주 잘 알겠지만, 나는 나의 Ti를 억누르면서까지 누군가의 조력자가 되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다.

ENTJ

유형을 추측하는 데 가장 애먹은 유형이다. 중학교 때부터 친구이지만 나는 ENTJ를 ENFJ 라고추측했었다. 본인이 ENTJ라고 말했을 때, 에 니가? 니가 그 유명한 돈 존나 잘 번다는 ENTJ? 라는 반응이 절로 나왔다. 이런 반응이 나온 이유는

 

1.

ENTJ: 나는 인생에서 사랑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해.

INTP: 미친놈. 토나와.

2.

ENTJ: 오늘 내 생일인데 K(5년 사귄 구애인)가 생일 축하한다고 안 해주네. 나는 헤어지고 나서도 K생일에 생일 축하한다고 말하고, 케이크 기프티콘 하나 줬는데.

INTP: 미친놈이네. 헤어졌는데 생일 축하를 왜 함?

ENTJ: 오늘 계속 K한테 카톡 왔나 안 왔나 폰만 확인함.

INTP: 코로나 핑계로 연락해봐.

ENTJ: 벌써 했지.

3.

ENTJ: K한테 연락해볼까 말까.

INTP: 하지말라고.

ENTJ: 아 그래도 연락 해볼까.

INTP: 아니. 하지 말래도.

ENTJ: 그래도 연락 한번만 더 해볼까? (백 번 더 물어봄)

INTP: (귀찮아서) 아 하든지.

ENTJ: 오예. 아싸. 연락 해야징~~

9.

ENTJ: 키우던 강아지 죽었을 때 아빠랑 강아지 화장터 가서 화장 시켰거든. 집 오는 길에 아빠차에서 울면서 잠들었는데……. 그거 알지?

ENTJ: 눈 떠봤는데 아빠가 담요를 덮어준 거야. 캬아. 이거 알지?

INTP: 오 알지알지. 영화 한 편 찍고 왔네. 눈물 흘리며 잠들었는데, 눈 떠보니 담요 촤아악? 알지알지.

ENTJ: 아무튼 존나 슬퍼서 개울었다.

13,

ENTJ: 너무 외로워서 오픈채팅 들어가서 대화했다.

INTP: 그게 뭔데? (그땐 진짜 몰랐음)

언뜻언뜻 보이는 NF 감성과 혼자서도 잘 노는 특징 때문에 ENTJ라는 생각을 못 했다.

NF 감성을 가진 것 처럼 보이기는 하지만, 실제 NF보다는 성격이 훨씬 시원시원하다.

어딘지 억척스러운 데가 있는 살가움 - 살가움 안에 있는 깨질듯 말듯한 관계의 취약성이 짜증남- 을 내가 무척 싫어해서 그런지는 몰라도, ENTJ 와는 농담도 대범하고 시원시원하게 주고 받을 수 있어서 좋다. 비굴하게 남의 눈치 보면서 분위기 재미없게 만드는 타입이 아니라, 눈치는 빨라서 선은 안 넘는데 (가끔 선 넘음) 할 말 다 하면서 담백하고 솔직한 편이다. 인기도 많은 편이다. 연애할 때는 책임감 있게 리드하는 편이고 상대방에게 충실한 타입인데 존나 별 거 아닌 이유로 자기 혼자 상대방한테 꽁해서 끝까지 자기 감정은 표현 안 하고 질질 끌다가 헤어지는 경우를 봤다. 연애할 때의 꽁하는 포인트는, ‘내가 그렇게 잘 해줬는데 나를 그런 식으로밖에 생각 못하나’ 식의 Fi 열등기능의 발현으로 보인다. 자존심 상하는 포인트가 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듣기엔 존나 아무 것도 아닌데 이상한 거에 배신감을 느낀다.

은근히 꽁한 부분이 있어서, 본인이 무언가에 기분이 상하면 받은대로 좀 티나게 되갚아주는 경향이 있다. 그냥 넘겨도 될 부분인 것 같은데 - 이런 데 발작버튼 눌리면 오히려 우스워지는-, 기억해뒀다가 농담을 가장해서 뼈 있는 말로 되돌려 준다. 그 꽁한 포인트는 대체로 자신의 능력이 비난당할 때.

Te는 딱 객관적인 사실을 판단하고, 그 판단을 토대로 추진하는 행동력과 관련된 기능이라면, Ti는 객관적 사실에서 더 깊이 들어가서 내적인 논리와 문제점을 파악하는 기능이다. Ti 주기능 유저인 내가 볼 때 ENTJ에게 Ti가 거의 부재하는 것처럼 느껴지는데, 그 이유는, ENTJ는 자신이 유능해질만큼의 객관적 사실만을 원하기 때문이다. ‘시험을 위한 공부를 해라. 학문을 하지 말고’ 는 말이 있다. Te와 Ti가 구별되는 지점이 딱 여기인데, ENTJ는 딱 시험 점수를 잘 받을 수 있을만큼을 보고, INTP는 시험 준비하는 주제에 박사과정 밟고 있는 인간처럼 학문을 하듯이 파고든다. 개인적으로 NT 중에 제일 NT 같지 않다고 느끼는 유형이 ENTJ 이다. 다른 NT에 비해 사고에 한계가 있구나 싶을 때가 많다 (ENTP는 부기능으로 Ti를 쓰고, INTJ는 주기능+부기능으로 Ti와 비슷한 성과를 낸다). 애초에 본인이 Ti를 원하지도 않고, 쓸모 없다고 여기는 것 같다.

둘이 만나면 주로 시시콜콜한 얘기밖에 안 하고, 주로 ENTJ가 본인 얘기를 하고, 나는 듣고 ‘너의 행동은 쓰레기였어. 쓰레기같은 놈아.’ 식으로 감상평을 덧붙인다. 실제로 유능한지는 내가 알 길이 없지만 - 시험은 잘 보는 것 같다, 그리고 자기 자랑 뜬금없이 존나 함-, 추진력과 책임감은 있는 것 같다. 아무튼 이러이러한 이유로 ENTJ를 ENTJ라고 추측하는 데 애를 먹었다.

 

ESFJ

일주일 한 번씩 수면제를 타러 가던 동네 내과의 안내데스크에서 일하던 사람이었다. 노인들이 많이 오는 병원이라, 화장을 공들여 한 티가 나고 생기 있는 ESFJ는 그곳과 어울리지 않아 보였다. 나는 그 즈음에 그 내과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동네 카페에서 매일 시험 공부를 하고 있었다. 여느때처럼 카페에 도착해 커피를 주문하려고 하는데, 왠지 낯이 익은 여자가 내게 아는 척을 해왔다. 그 여자의 얼굴을 빤히 쳐다봤지만 누구인지 도저히 알 수 없어서 난감해하고 있는데, 여자가 “000내과….” 라고 말했다. 그제서야 여자의 눈두덩이 위에 곱게 발린 반짝거리는 쉐도우가 눈에 들어왔다. 나는 어색하게 알은 체를 하다 커피를 시키고 내 자리로 돌아왔다. 자신의 커피를 기다리던 여자가 눈치를 보며 은근슬쩍 내 테이블로 오더니 말을 걸기 시작했다. 항상 책을 바리바리 싸들고 다니길래 궁금했다며, 무슨 공부를 하는지, 학교는 어딘지, 무슨 과인지 등등을 티없이 밝은 얼굴로 물어왔다. 웃는 얼굴에 대고 대답을 안 해주기도 뭣해서 굳이 내 얘기를 하고 싶지 않았지만 하나씩 대답을 해줬다. 내가 법학과라고 하자 여자가 ‘어머 어머’ 이런 소리를 냈다. 자신도 법학과라고 했다. 그렇구나. 근데 왜 내과에서 일하세요? 라고 물어보자 사실은 사시를 몇 년 준비하다 떨어져서 아빠 병원에서 일하게 되었다고 대답했다. 원장님이 아버지라고요? 내가 놀라워하며 묻자 여자가 그렇다고 했다.

다음 날, 다시 카페에서 공부를 하고 있는데 모르는 아이디로 카톡 메시지가 왔다. 어제 그 여자였다. 내가 내 번호는 어떻게 알았냐고 물어보자, 그 여자는 병원 개인정보를 보고 친해지고 싶어서 연락했다고 말했다. 법학과 나왔으면 법에 저촉되는 행위인 걸 알텐데 왜 이러는 걸까, 이래서 사시에 떨어졌나? 싶었지만 입밖으로 그말을 꺼내진 않았다. 이 에피소드를 레즈인 infp 친구에게 들려주자, infp 친구는 그 여자가 나를 좋아하는 게 틀림없다고 했다.

그후로 일주일에 한 번씩 내과에 약을 타러 갈 때마다, 안내데스크 앞에 서서 내 차례를 기다리며 그녀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이야기는 늘 그녀를 위한 인생 상담 비슷하게 흘러갔다. 그녀가 법조인이 되는 꿈을 아직 못 버렸다고 하면, 로스쿨 가세요 하고 나는 말했고, 그녀가 독일 유학을 가보는 것도 생각해봤다고 하면, 독일어가 문제긴 한데 꾸준히 배우시면 잘 하실 수 있을 거예요. 제가 학원 소개해드릴게요, 라고 나는 말했고, 요즘은 심리상담 자격증을 따려고 수업을 듣고 있다고 그녀가 말하면, 멋진 일 하시네요, 라고 나는 말했다. 어느날은 그녀가 눈을 반짝이며 내게 혹시 엠비티아이 라고 아세요? 하고 물었다. 그녀는 이번에 처음 엠비티아이 테스트를 해봤는데 본인과 딱 맞아서 너무 신기하다고 했다.

사람 없이 못 사는 티가 나긴 했지만, 이제서야 엠비티아이 테스트를 해볼 정도면, 인터넷을 많이 하는 편이 아니구나 싶었다. 인터넷 대신 사람을 만나고 다니겠지.

그녀는 내게 무슨 유형이냐고 물었고 나는 intp라고 대답했다. 그녀는 엠비티아이를 알게 된 지 하루밖에 안 된 사람답게, 네 아이? 그다음에 엔? 엠?? .. 티..피? 생소하다는 듯이 알파벳을 물었다. 그녀는 내 유형을 차트표 모서리에 적더니, 이거 맞냐고 내게 보여주며 물었다. INTP라고 적힌 철없고 삐뚤한 글씨가 아직도 기억난다. 그녀는 내 유형을 휴대폰으로 검색하며, 저랑 완전히 다 다르네요. 저는 ESFJ 이거든요, 라고 했다. 그래서 내가 아직까지 그녀의 유형을 기억한다. ‘저랑 완전히 다르네요’

그녀와 그녀의 아빠는 내 얘기를 서로 주고 받은 게 확실했다. 진료를 받을 때면 원장은 ‘요즘 이런 공부를 한다면서요?’ 하고, 그녀에게만 말해주었던 얘기를 했다. 원장은 내가 무릎에 올려놓은 책등의 제목을 곁눈질로 읽곤 했다. 어느 날은 내게 현 정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물었다. 그녀는 일주일 뒤에 아빠가 그런 걸 물었다면서요? 하고 내게 말했다.

내가 수면제를 끊고 이사 하면서 그녀와 자연스럽게 연락이 끊겼다. 인터넷에 떠도는 ESFJ의 특징을 읽으면 가끔 그녀가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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